<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19회> 전쟁의 영웅 들

<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19회> 전쟁의 영웅 들

 

전쟁은 미치광이를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웅을 만들기도 한다. 전쟁의 영웅(War Hero)은 전쟁에서 전설적인 전과를 이루어낸 군인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 말은 수많은 전쟁에서 탄생한 영웅들을 부르는 호칭이다. 일반적으로 보통의 병사들이 상식적으로 해낼 수 없는 초월적인 전적을 올린 병사들에게 사용하곤 하지만, 그 외에도 좋은 전적을 올릴 수 있도록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한 사령관이나 지휘관들에게도 쓰곤 한다.

제2차 세계대전때는 적과 아군을 망라하여 수많은 전공과 전과를 얻은 용맹하고 지혜로운 명장이나 훌륭한 지휘관이 연합군측에서나 독일군측에 너무나 많았었다. 여기서 대표적인 영웅을 꼽으라면 나는 영국군의 육군원수인 몽고메리 장군과 독일군측의 육군원수인 롬멜장군을 꼽고 싶다.

이들에 대한 소개와 그 전쟁중의 업적은 잠시 후 소개를 하여드리도록 하겠는데, 세계 2차대전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전쟁의 영웅들을 보는 관점이나 평가가 사뭇 다르게 매겨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때까지만 하더라도 혼란스러운 세계정세에서 자국의 병사들중 전쟁 영웅이 하나있으면 그 병사는 해당국가의 전 국민적인 아이돌과 마찬가지일 정도의 인기를 얻어 뛰어난 선전효과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드라마 더퍼시픽의 주인공중 한명인 과달 카날의 영웅 존 바실론이 전투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환영을 받고 미국인의 우상이 되는 장면이 있다. 또한 양차대전(세계1, 2차대전)을 통털어 높은 격추수를 기록한 전투기 에이스들은 거의 전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다. 말 그대로 전쟁영웅이라는 의미의 War hero라는 표기 외에도 ‘국민적인 영웅’이라는 의미의 National Hero라는 표기가 자주 쓰이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하지만 인권이 발달하고 여론매체의 발달로 전쟁의 참혹한 현실이 일반인들에게 퍼지게 되면서, 또한 현대전이 점차 기계화되고 대량의 인명이 소모되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반전 열풍으로 인해 더 이상 전쟁영웅이라는 존재가 나타나기 어려운 추세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베트남전쟁의 영웅들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는 어느쪽이든 당시의 전공을 자랑하기 힘들어진 편이고, 우리나라를 북한의 침공에서 구해준 구국의 영웅 맥아더장군은 지금은 일부 좌파들 적색분자들에 의해 전범의 원흉이자 죽일놈이 되어, 인천의 한 공원에 세워져있는 그의 동상마저 화염병이나 돌덩어리 세례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이라크전쟁역시 민간인학살이나 무슬림에 대한 모독 및 미국의 헛짓이 부각되고, 점차 이슬람권, 서방권의 이념싸움 같은 방향이 되면서 취급이 영 좋지 않은 상태이다. 그러나 현대전에 있어서 전쟁영웅은 새로운 방향으로 모색되어 가는데, 예전과 같은 압도적인 전과를 세운 영웅보다는 동료를 잘 보호하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거나 죽음을 각오하고 전우를 살리기 위하여 전장으로 뛰어드는 경우로 바뀌고 있다.

미국에서 전쟁 영웅으로 확실하게 인정되는 명예훈장의 최근 수여자들의 전과 역시 동료를 보호하거나 죽음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전우를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영웅의 패러다임이 바뀐 것 보다는 고화력화 되고 기계화된 현대전에서 개인의 무공으로 전과를 일깨워낸 것보다는 휴머니즘적인 희생이 더 많이 발견된 것이기도 하다. 어쨋거나 시대가 많이 바뀌고 세월이 많이 흘러간 현대의 이야기는 이러할지라도, 나는 제2차 세계대전당시의 빛나는 두 전쟁영웅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다. 영국 육군원수인 버나드 몽고메리장군과 독일 육군원수인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장군의 이야기이다.

버나드몽고메리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당시 북아프리카와 유럽의 연합군 상륙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가장 영향력 있었던 영국의 육군원수이다.

그는 오만한 만큼 자존심이 강하고 병적일정도로 대미 우월감이 강한 영국 군인이었다. 몽고메리는 군인으로서는 누구보다도 탁월한 지휘력을 가지고 용맹을 떨쳤지만 거만하고 거칠고 허영심이 많고, 때로는 기상천외한 일도 저지르는 인물로도 평가되고 있다. 그럼에도 전투에서 부하장병들을 독려하여 끊임없이 전진, 승리를 거머쥐게 한 마력의 소유자라고도 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최전선에서 용맹성과 뛰어난 참모역할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고, 프랑스 전투에서 바로 전날 작전계획을 세우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몽고메리의 소대는 르카토에서 독일군과 맞서 싸웠지만, 많은 소대원들을 잃고 자신도 며칠동안 행방불명자로 신고 되기도 한 쓰라린 패배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대 학살전이 벌어진 소머지역 전투에 참가해 탁월한 전투지휘관 참모장교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사단을 지휘하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다시 프랑스에 상륙해 자기 사단의 임무는 초기전투에서 연합군이 후퇴하기전 추격하는 독일군에 대항해 벨기에의 루방지역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그는 던커크전투에서 독일군이 연합군 교두보를 측방 공격하지 못하게 방어하면서 후퇴작전 중 후방 방어를 지휘했다. 몽고메리는 영국으로 돌아와 대장계급장을 달았다.

영국군 사령관으로 선정된 한 사령관이 북아프리카에서 항공기사고로 사망하자 몽고메리가 대신 사령관직책을 맡게 되었고, 독일의 에르빈 롬멜장군이 이끄는 아프리카군에 전투때마다 연전연패해 장병들의 사기가 극단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을 알고 해결사로 제8군 지휘봉을 잡게 된 것이었다. 그는 즉각 제8군의 신뢰와 자신감을 쌓는 작업에 착수, 장병과 탱크, 포를 증강했다. 1942년 8월 31일부터 9월 2일까지 아람할파지역 전투에서 몽고메리부대는 롬멜부대의 전진을 저지했고, 이 전투로부터 한달이 지난 후 몽고메리는 병력, 무기를 독일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증강, 주도면밀한 반격을 개시해 독일군의 숫적 열세와 병참지원의 약점을 이용, 전투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다. 북아프리카 전투 승리때는 몽고메리 생애 최 전성기였다.

몽고메리는 모든 작전계획이 완벽하지 않을때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거부했는데, 이런 작전태도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얻은 경험 때문이었다. 인간이기 때문에 장-단점을 갖고 부하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모든 계급의 부하들로부터 칭송과 인기를 모았지만 부하들에 대한 과잉 요구와 빈번한 파면 조치 등은 그가 동료장군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연합국가들은 그의 엘리트주의적 태도와 오만한 성격을 싫어했지만 처칠은 그의 용맹성을 격찬하였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그는 미국 전쟁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몽고메리는 전후 영국 점령군 사령관으로서 독일에 머물렀고 51년부터 58년 은퇴할때까지 나토군을 지휘했다.

다음은 독일의 전쟁영웅 에르빈 요하네스 오이겐 롬멜(1891년 11월15일~1944년 10월14일)의 이야기이다.

‘전쟁터에서는 총알이 한발 더 많은 자가 이긴다. 전장은 무질서가 넘치는 곳이다’, ‘하나의 철십자 훈장보다는 한 대의 전차와 휘발유를 다오’, ‘세상이 널 버렸다 생각하지 마라. 세상은 널 가진 적이 없다’. 이 말들은 독일 전쟁영웅인 롬멜장군의 어록에서 발췌한 말이다.

롬멜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원수로 독일은 물론 연합군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군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탁월한 전략과 전술로 연합군의 가장 강력한 적이었고 히틀러가 가장 신임했던 장군이며, 히틀러의 헛된 욕망에 거리낌 없이 일침을 가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인물임과 동시에 히틀러의 침략 전쟁의 가장 선봉에 서서 용맹하게 싸웠던 사람이다.

롬멜은 독일 남부 하이덴 하임의 시골 중학교 교장의 아들로 태어나 지극히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18세에 프로이센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24세때 중위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탁월한 군사력의 천재성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로이센이 패배한 뒤에도 롬멜은 독일군에서는 일반 참모로 복무하는 것이 진급의 정상 코스였으나 그는 이 길을 거부하고 가르치는데 각별한 재능을 살려 각종 군사학교의 교관에 임명되었다. 롬멜은 히틀러의 경호임무를 맡아 히틀러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독일군 수뇌부 대부분이 귀족출신인데 비해 평민출신인 롬멜에 대한 히틀러의 애착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1940년 제 7기갑사단의 사단장직을 맡게 된다. 그는 기갑부대를 지휘한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공격임무에서 기계화된 기갑부대의 엄청난 가능성을 재빨리 파악하여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해협 연안에서 기습공격은 그의 대담성과 창의력을 보여주는 최초의 증거가 되었고 제 7기갑사단은 연합군으로부터 “유령사단”이라는 별명을 받기도 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다음호에도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공부를 계속 이어갑니다.>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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