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14회>  세계 제2차 대전과 히틀러 이야기

<김명렬 유럽여행 기행문 / 14회>  세계 제2차 대전과 히틀러 이야기

 

지난주에 예고하여 드린 대로 이번 주에는 오스트리아 여행 기행문을 써 올려드릴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가장 중요한 독일의 과거사 정치 이야기를 빠뜨렸다. 이제까지는 독일에 대하여 여러가지 측면에서 보고 느끼고 배워 왔던 지식과 역사를 배경으로 글을 써 올렸는데, 정작 독일에서 발발한 세계 제2차 대전과 나치정권, 그리고 전쟁의 중심에 서있던 인물로 아돌프 히틀러를 빼놓을 수가 없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추가로 더 기술해 올릴 예정이다. 우리는 세계 제2차대전 하면 가장먼저 떠오르는 것이 유태인학살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수백만명의 유태인들과 그외 여러나라의 종족들이 집단수용소에서 유독가스를 마시고 집단으로 죽어갔고, 그중 일부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료 연구용으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기슴 아픈 세계적인 역사적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되며, 또 다시 이러한 비극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말아야 한다. 여기에 이러한 인간 잔학상의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며 우리가 미처 몰랐던 공부를 하는 자세로 옛것을 들춰 독자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고 소개하여 드리도록 하겠다. 우선 먼저 집단수용소에서 대량학살을 거론하려면 그 악명 높았던 홀로코스트(Holocaust)를 생각해야한다.

홀로코스트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holos) 태워서(kaustos)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홀로코스트는 대량학살을 지칭하는데 쓰였지만, 1960년대부터 학자들과 유명 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8년 방영되었던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이 개념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로 평가받았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중 아돌프 히틀러가 이끈 나치당이 독일제국과 독일군 점령지 전반에 걸쳐 계획적으로 유태인과 슬라브족, 집시, 동성애자, 정치범등 약 1천1백만명의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학살한 사건을 의미한다. 사망자중 유태인은 약 6백여만명으로, 그당시 유럽에 거주하던 9백만명의 유태인중 약 3분의2에 해당한다. 유태인 어린이 약1백만명이 죽었으며, 여자도 2백만명과 남자 약 3백만명이 죽은 것으로 파악된다. 유태인과 기타 피해자들은 독일전역과 독일 점령지의 약 4만여개의 시설에 집단수용, 구금되어서 죽었다. 이러한 박해와 학살은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1935년도에 제정된 뉘른 베르크 법을 비롯하여 유태인을 사회에서 배척하는 각종 법령들이 세계대전 발발전에 제정되었다. 또한 집단수용소를 지은 후 수감자들은 강제노역에 동원되었고, 이들은 대부분 과로사하거나 병사하였다. 동유럽 점령지의 경우, 특별행동부대 라는 불법 무장단체가 1백만명이 넘는 유태인과 정치사범을 총살했다고 알려졌다. 독일군은 유태인과 집시들을 게토에 수용한 후 화물차에 실어서 집단학살수용소로 이송했다. 화물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는데, 살아남은 이들은 차례대로 가스실에 끌려가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 학살에는 독일 관료제 전체가 관여했다고 알려져 있고, 한 홀로코스트 학자는 이 때문에 독일의 제3제국을 ‘학살국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나치독일의 유태인학살은 히틀러 한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들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의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 이와 더불어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

또한 데 호막(De homag=독일 IBM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의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또한 독일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태인학살 피해자들에게서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고 평했다.

다른 학자들의 경우 대개 보면은 학살정책의 핵심은 영토와 자원의 통제 등 실리적인 사항들이었다. 이에 반해 홀로코스트의 기본적 동기는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이었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아리아인이 지배해야할 세상에서 국제적으로 유태인들이 반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나치의 허황된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는 말했다.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 ‘현재의 확인으로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중부와 동부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백만명이 넘었는데 약5백만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백만명, 소련에서 1백만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죽었다.

반제회의(Wannsee protocol)에서는 나치당이 그들의 궁극적 해결책을 영국과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트칼, 스페인등 중립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없이 말살 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태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들의 조부가 1871년 1월2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태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

집단 수용소에 대하여….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으로 죽이려는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 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하여 벨첵, 헬름노, 야세노박, 마자넥, 말리트로스테네츠, 비보르, 트레블링카등에 세워졌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명, 벨첵에서 60만명, 그리고 소비보르에서 25만명이 희생되었다.

수용소 내에서의 생체의학 실험…. 나치학살의 특징적 요소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의학실험을 자행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Raul Hilberg)에 따르면 ‘독일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고 말했다.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샤우, 부헨발트, 라벤스브뤽, 작센하우젠, 나츠 바일러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실험을 거행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조세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맹겔레박사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하였는데, 이중에는 실험대상자를 고압력 방안에 집어넣는 실험, 얼음방안에 집어넣는 실험, 약 임상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등이 포함되었고, 이외에도 수많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외과실험이 있었다. 실험으로부터 설사 살아남은 자들은 거의 다 즉시 살해되어 인체 해부되어 다시 실험용으로 쓰였다. 멩겔레박사의 실험기록은 현재 유실되었는데 이는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박사가 기록들을 모두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멩겔레박사는 특히 집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하였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유인하여 데려갔다.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정도 된 구이도와 이나 이다. 어느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 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있는 상태였다. 그 상처는 감염이 되었고 피와 진물이 끝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고 피까지 토했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는 어딘가에서 몰핀을 구해왔고, 아이들이 잠든 사이 그 아이들을 목졸라 죽였다. 차라리 그렇게 죽이는 것이 자기의 자식들에게는 고통을 덜어주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믿었기에, 어차피 죽어갈 목숨이며 더 이상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자식을 목졸라죽일 수밖에 없었다.

가스실의 죽음…..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휘쓰에 의하면 벙커1은 800명을, 벙커2는 1200명을 한꺼번에 처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단 가스실에 입실이 완료되면 모든 문은 잠기고, 고체 알갱이 상태의 치클론 B가 벽옆의 위쪽에 붙어있는 환기구를 통하여 투여되고 이는 곧 유독한 사이안화 수소를 내 뿜는다. 3분의 1이 즉시 즉사하고 20분 이내에 환기구에 가까운 쪽부터 모든 입실자들이 사망하게 된다. 가스가 들어가면 실내에서는 고함과 비명이 가스실의 모든 틈새를 통해 들려왔고, 그속에서는 아비규환의 단발마 비명속에 모든 생명체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몸이 뒤틀린 채 죽은 이들의 피부는 검붉게 변했거나 푸른 반점들이 몸 전체에 묻어나있으며 일부는 거품을 물고, 입, 귀, 코 등의 구멍에서는 피를 흘리고 죽었다. 이들이 죽고난 뒤 화장을 하기 전 여성들의 모발은 모두 잘라내어 수거하고, 치과의사들은 포로들의 금니들을 적출해냈다. 죽은 이들의 시신은 집단으로 화장을 하거나, 땅을 파는 기계로 넓고 깊게 파놓은 구덩이 속에 집단으로 몰아넣어 매장을 하기도하였다. 하루에도 여러번씩 이렇게 수천 내지 수백명씩 수용소의 포로와 수용인들은 가스실에서 독가스를 마시고 죽어갔다.

이러한 집단 수용소의 생체실험은 유독 독일 점령지의 수용소에서만 자행된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를 36년동안 강제로 합병하여 학살정치와 고문, 폭행, 재산몰수, 감금, 암살 등등의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놈들(그들은 일본인 이란 인간적인 대우의 호칭도 받을 자격이 없는 나쁜 인간들이기에 여기서 “놈들”이라고 지칭을 하여 부르겠다)도 만주에서 731부대를 운영하면서 갖은 악행과 생체실험을 자행했다. 다음호에서는 그 실체와 만행의 잔학상을 소개하여 드리도록 하겠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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