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이 가을에 띄우는 편지

<김명열칼럼> 이 가을에 띄우는 편지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시려 울 정도로 파아란 하늘이 하늘높이 펼쳐져있습니다. 파란 하늘위에 하이얀 뭉게구름이 바람에 떠밀려 유유히 어디론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폭염과 열기로 뒤덮여 나태와 지루함으로 힘들어했던 8월도 어느덧 우리의 곁을 떠나가고 이제는 9월이 성큼 우리의 곁으로 다가와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습니다. 여름내 얕으막하게만 보였던 하늘이 9월달이 되고 보니 한층 더 높아 보이고 파아랗게 변색되어 물감을 칠한 듯 짙푸르게만 보입니다. 가을이 되면 많은 이들이 시인이 된다고 합니다. 나 역시 시인이 된 기분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파란하늘 흰구름이 보기 좋은날, 가을이 파랗게 물들어갑니다. 가을빛이 아름다워 보기 좋은날, 높아진 하늘만큼 낮아진 내 마음, 바람처럼 소리 없이 찾아온 가을의 모습을 따라, 내 가슴마다 낙엽 한 잎 떨구어 놓고, 가을의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 한 여름의 무더위가 한풀 꺾인 느낌을 주는 계절 요즈음, 화사한 햇볕에 노출되어 파란물감을 칠해놓은 듯 한결 더 파아래 보이는 하늘이 나를 유혹하여 밖으로 나와서 그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무심코 카메라의 샷터를 눌렀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인 속에서, 파란 하늘보고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 겨울엔 겨울엔 하얄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인속에서, 하얀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이 동요 노래는 한국의 어린이들은 모르는 아이가 없을 정도로 즐겨 부르는 순수(純粹)에의 동경을 잘 나타낸 동요입니다. 이효선 작사, 한용히 작곡인 이 동요를 들을때마다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성경말씀에 보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18: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른들이 어린이를 본받아 어린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세상은 지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세상 사람들은 말세가 되었다고들 한탄을 하며 세상을 탓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키기 어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힘써 얻은 권력과 명예나 재물, 이런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이 시대 사람들의 정절이겠습니까?. 저의 생각과 판단으로서는, 세상에서 정말 지키기 어려운 것은 순수라고 생각합니다. 위에 앞서 ‘어린이들과 같이 되라’는 말도 결국은 순수해지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순수란 무지(無知)와는 별개의 것입니다. 순수함과 무지함이 혼동될 때 우리는 그 순수 자체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우(愚)를 범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나는 남에게 듣기 좋은 말만 전한다”고 하는 사람은 언뜻 보기에는 순수한사람 같으나 실제로는 무지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지식을 얻고 이에 대한 깨달음이 있으면 진리를 추구하는 욕망이 생기게 마련인데, 모난 돌이 되지 않으려는 얄팍한 생각으로 진리와 배치되는 일을 대하면서도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그는 이미 순수함을 잃어버린 사람이고, 그 자체가 무지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남에게 좋은 말만 전하는 사람치고 좋은 사람 없다는 말에 공감이 가기도합니다. 그러나 지성과 교양을 함께 구비한 순수함이야말로 진정 얻기도 힘들뿐 아니라 또한 지키기는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머릿속에 조금 든게 있다고 천방지축으로 남을 업신여기거나, 가장 순수해야할 사랑을 헌신짝처럼 쉽게 버리고 배신하므로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추악한 모습, 그리고 남의 등을 밟고 일어서려는 영악한사람들에게는 결단코 순수함을 찾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이 없는 지식은 그만큼 때가 묻은 것이고, 그래서 순수하지 않다는 것과 일맥 상통할 때, 우리는 차라리 좀 덜 알아도 순수한쪽을 택하는 것입니다.

순수를 상징하는 흰빛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원래부터 흰빛과, 모든 빛을 흡수하여 이루어진 흰빛입니다. 우리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모두가 원래부터 흰빛이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도중에 붉은빛, 푸른빛, 노란빛 등등으로 물들어서 흰빛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그 모든 빛을 흡수하면 또다시 흰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한 희망을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순수에의 동경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의 이치와 인생의 허망함 등 모든 것을 알고 난 노인이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들께서는 그 두 가지의 흰빛 중에 어느 쪽에 속하며,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습니까? 나이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인식에 따라 얻을 수 있는 그런 순수의 조건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순수를 말하다 보니 고려 말기의 나옹선사의 ‘청산은 나를 보고’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고승 나옹선사의 시를 읊다보니 불현듯 김연준 작사 작곡의 우리가곡 ‘청산에 살리라’가 생각납니다. 나는 수풀우거진 청산에 살으리라, 나의 마음 푸르러 청산에 살으리라, 이 봄도 산허리에 초록빛 물들겠네, 세상 번뇌 시름잊고 청산에서 살리라, 길고 긴 세월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9월이 되었습니다. 맑고 푸른 청명한 하늘이 무척이나 높아 보입니다. 이맘때쯤의 내 고향 농촌에서는 따뜻한 가을볕에 벼이삭은 익어가고 과일들도 영글어갈 것입니다. 미리 알리지도 않았고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가을은 허전한마음 깊숙히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가을은 고독과 사색의 계절입니다. 낙엽이 질때의 그 허무함, 그리고 언젠가 떨어져야하기에 마음이 허전합니다. 그 허전함과 텅 빈 마음 때문에 가을은 모두가 시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곁에 찾아온 이 가을은 결실의 계절이고 수확의 계절입니다. 가을은 모든 땀의 마침표입니다. 봄부터 농부는 열매를 기대하면서 땀을 흘립니다. 농부에게 있어서 열매는 기쁨이고 보람입니다. 그리고 삶의 존재 의미입니다. 열매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열매는 타인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열매는 먹히기 위해 존재합니다. 먹힘으로 행복한 것이 열매입니다. 사람들은 꽃을 더 좋아합니다. 꽃에는 향기가 있고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꽃에는 그 속에 생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매는 그 속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 씨앗 속에 내일이 있고 미래가 있고 꿈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꽃처럼 한순간의 자랑이나 인기를 위하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열매가 사람을 살리고 사람에게 기쁨을 주듯이, 이 가을에 우리는 열매가 되어야합니다.

이제 이 가을도 얼마 후면 낙엽들은 하나둘씩 떨어질 것입니다. 낙엽이 떨어진 앙상한 나무는 자기 내면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입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거추장스럽고 무거운 세속의 욕심을 털어 내버려야 합니다. 인간의 위선, 가면, 자신이 아닌 것으로 자신을 포장했던 그 많은 낙엽들을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래서 가을은 진실된 인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계절입니다. 태양이 가장 고울 때는 저녁노을이고, 잎이 가장 붉을 때는 가을입니다. 그러나 그 소중함도 짧고 순간적이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사람도 한 세상을 살다가 황혼녘, 인생의 저녘 노을이 곱게 물들 때가 가장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합니다. 나도 그렇게 곱고 아름답게 보여지고 싶습니다.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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