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광복절을 맞으면서…

<독자투고>  광복절을 맞으면서

강대수 (아폽카 농부)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광복절은 늘 여름방학 가운데 끼어 있었다. 방학 때 학교에 비상 소집되어 가는 건 무척 싫었으나 광복절만큼은 달랐다. 온 가족이 밤늦도록 매달려서 창호지에 그리고 물감 칠을 해서 정성껏 만든(요즈음 눈으로 보면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모양이지만)그 태극기를 하나는 집에 달고 하나는 소중하게 접어들고 학교로 가는 아침엔 왠지 모르게 경사스럽고 좋은 일이 닥칠 듯 한 기분에 마음이 들뜨곤 했다. 마을 유지 어른들도 참석한 가운데 교장 선생님의 경축사에 이어 광복절 노래를 함께 부르고 만세 삼창을 외칠 땐 코끝이 시큰둥해지곤 했는데, 이날은 단순히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것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를 세운 경사가 함께 겹쳐진 참으로 기념할만한 날이어서 방학 하루를 잃어버리는 억울한 기분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렇듯 국경일 가운데서도 으뜸이던 광복절을 언제부턴가 기분 좋게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이 기분 잡치게 하는 일은‘우리 민족끼리’를 주장하는 종북 세력과 일부 민족주의자들이‘8.15’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일뿐이며, 1948년 8월 15일은 이른 바‘태어나선 안 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 규정하고, 광복절이 품고 있는 ‘건국’의 의미에 시비를 걸어온 데서 비롯된다. 이들의 집요한 주장은 교육과 언론, 문화계와 정치권을 통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국민들의 인식까지 뒤바꾸기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맞불로 보수 역사학자들이 건국절 주장을 펼치게 된 배경이다.

지난 3.1절 기념식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한민국의 건국은 3.1 운동 이후, 상하이 임시 정부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내년 2019년이 건국 100주년이라고 건국절 논란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한 건국 100주년 주장을 가만히 놓고 볼 때, 근대사에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누구에게라도 다음과 같은 커다란 구멍이 보일 수밖에 없다.

첫째, 건국 100주년의 기산점으로 상하이 임시 정부가 발족한 4월 13일(요즈음은 이틀 더 당겨 4월11일이라 한다. 이것부터가 요지경이다.)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국내외에 여러 임시 정부가 러시아 연해주, 중국, 만주, 한성 등에 세워져 있었고, 말할 가치조차 없지만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들이 따로 세운 임시 정부도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 온 국민에게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아 세운 정부는 한 군데도 없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임시 정부를 세운 이들이 다 훌륭한 민족 지도자들이거나 그에 준하는 훌륭한 분들이긴 하였으나 국민의 대표로서 뽑힌 일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가장 영향력이 컸던 상하이 임시 정부도 민족 지도자 몇 사람이 발기인이 되어 시작한 일이므로 국민의 대표라는 정통성을 전혀 띠지 못한, 사적인 조직체로서 출발한 것이었다. 신혼부부가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이름도 지어 놓고 옷도 미리 준비해 놓은 날이 아기의 생일이 될 수 없듯이 임시 정부의 국호 제정과 태극기 채택은 장차 태어날 대한민국을 준비하는 단계였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둘째, 한 나라를 이루는 네 가지 요소, 곧 국민, 국토, 주권, 정부를 충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당시 그 어떤 나라에서도 망명 정부를 승인한 사실이 없었다. 그들의 눈에는 조직된 군대도, 조세권이나 화폐 발행권도 외국과의 조약을 맺을 수 있는 권한도 없는 사실상 유령 정부나 다름없이 보였을 임시 정부를 어떻게 승인할 수 있었을까?

셋째, 해방 후 만들어진 노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가사 가운데 ‘통일’은 원래 ‘독립’이었다고 한다. 이는 그 당시 일본으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아직 독립하지 못한 나라의 상황을 잘 말해 주는 것이다.

넷째, 건국 70주년을 부정하는 그 이면에는 다분히 북한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라는게 드러난다. ‘대한민국 수립’을 기술한 국정 교과서를 폐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두드러지게 기술한 왜곡된 검인정 역사 교과서를 채택하는 건 이적 행위나 다를 바 없는 북한 편들기나 비위 맞추기 또는 아부로 보인다.

 

이러한 헛점이 있는데도 건국 100주년을 고집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주장을 보면, 현행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은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들어가 있음을 들고 있다. 이것은 민주화 주장이 거세게 일던 1987년 당시, 집권 세력이 정치적 타협으로 만들어 낸 결과물로서 건국에 대한 의지와 정신을 이어 받자는 것일 뿐, 역사적 진실은 되지 못한다.

또 어떤 이는 미국의 경우,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1776년을 건국일로 하고 있지 않느냐고 말한다. 미국의 경우엔 그 당시, 각 주 주민을 대표하는 13개 주 의회의 대표자들이 2차 대륙 회의를 열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였고, 이미 영국에 맞설만한 실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으며, 대륙 의회가 행정부로서의 기능도 대행할 정도였으니 국민의 대표성이나 정부 기능이 전혀 없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는 사정이 다르다.

유엔의 결의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하여 국회의원을 뽑고 국회의원들이 다시 대통령을 뽑아 제대로 된 정부를 세우고, 그 정부가 마침내 유엔의 승인을 받은 것이 역사적 사실일진대 어째서 1948년 8월 15일이 건국일이 아니란 말인가?.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 많은 애국지사들의 독립을 향한 정성이 하늘을 움직여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었고, 또 3년 뒤 그날에 한반도에서 합법적인 유일한 정부를 세우게 되었다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가르쳐 왔다면 광복-건국절 시비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미국인들이 독립 기념일(Independence Day)을 자연스레 자기 나라 건국일로 생각하듯이 말이다. 논란 가운데 있는 역사 문제를 역사학자도 아닌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쐐기를 박으려는 건 갈등을 더 깊게 만들 소지가 있다.

누가 뭐래도 어린 시절의 여름 방학과 그 경사스럽던 8.15 광복절이 머금고 있는 해방과 정부수립(건국)의 추억을 한 줌 흙 속에 묻어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강대수 (아폽카 농부) / 11312018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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