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열칼럼> 산토끼 토끼야 (생활속의 이야기)


<김명열칼럼> 산토끼 토끼야 (생활속의 이야기)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총깡총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서 올테야. 다음은 또 다른 동요 가사.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토끼가 눈비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가지요.
이상은 우리나라 전래동요인 산토끼 노래와 옹달샘 노래 가사의 일부이다. 그러나 토실토실 알밤이나 세수하러왔다가 물만 먹고 가는 산토끼는 이제 한국의 산에서 찾아보기가 힘들게 됐다고 한다.
옛날에 농,산촌에 사는 사람들은 겨울철에 산토끼를 포획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었다. 눈이 내린 다음날, 철사 또는 삐삐선이라 부르는 전화선을 이용해 올무를 만들어 토끼사냥에 나섰다. 그러나 전화선이나 철사를 구하기 어려웠던 내 고향 시골에서는 철사와 전화선 대신 칡넝쿨을 이용해 올무를 만들어 토끼를 잡았다. 나의 아버지께서도 산에 나무를 하러 같다 오시면 가끔씩 산토끼를 잡아 나뭇짐 속에 넣어 지고 오셨다. 재수가 좋으면 어느 때는 두 마리를 잡아오시는 경우도 있었다. 토끼를 잡아온 그날 저녁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잔칫상을 받은 듯 고깃국(토끼 도리탕)을 먹으며 즐거워했다. 고기와 쌀밥이 귀하던 그때, 가금씩 겨울철에 잡아온 산토끼 요리는 육식이 부족한 영양의 불균형을 유지시켜주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잡아온 산토끼 요리를 귀한 손님이 오면 대접할 정도로 시골의(산촌) 마을에서는 고급음식으로 취급되었다. 그러한 맛있고 고급요리를 제공해주던 산토끼의 개체수가 최근 한국의 산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사람들이 애완용으로 기르던 고양이를 버리거나, 집주인의 관심을 받지 못하던 집괭이(고양이)들이 밖으로 나가서 야생이 되고 지들끼리 번식을 하면서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나 산에 가면 야생 고양이나 심지어 개들까지도 지천으로 널려져 살고 있다고 한다. 야산에는 산토끼며 들쥐가 많기 때문에 버려진 고양이들은 사람들이 사는 집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또 개에 비하여 100여배나 높은 고양이의 번식력은 삽시간에 고양이가 지천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에도 같은 현상으로 나타났다. 20여년전, 미시간의 어느 농촌마을로 이사한 지인이 있었다. 대도시에 살다가 처음으로 한적한 시골 농촌의 전원지대로 이사 왔을 때는 사방이 숲으로 덮여있었고 그 숲속에는 각종 야생 동물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유독 산토끼가 많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토끼들이 많은 이유는 주변에 끝도 없이 펼쳐진 광활한 농경지가 있어서 그곳에는 각종 농작물들이 경작되고 있어 토끼들의 풍부한 양식의 공급처가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이나 현실은 오래가지 못했다. 언제부터인가 한, 두마리씩 보이던 개(유기견)와 고양이들이 순식간에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먹이감으로 토끼를 잡아먹기
시작했다. 자연적으로 토끼의 숫자는 줄어들고 보기가 힘들어지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의 집주변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우리들 주변에도 야생 토끼(산토끼)가 가끔씩 눈에 띈다.
수십층 높은 빌딩의 숲으로 둘러싸인 시카고 다운타운 중심가 밀레니엄 팍이나 레익사이드 시립공원에도 야생의 산토끼를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나 나무와 숲으로 사시사철 그린색을 유지하고 있는 이곳 플로리다는 야생동물들의 지상낙원이다. 먹을 것이 풍부하니 번식력도 왕성해 설사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힌다 해도 개체 수는 현상을 유지하고 있다. 산토끼역시 마찬가지다.
지난주 어느 날, 나는 새벽기도 예배에 참석키 위해 일찍(오전5시) 집을 나섰다. 주택단지 입구의 게이트, 정문을 나선 10여미터 전방의 도로 한복판에 이상한 물체가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에 비쳐 보였다. 속도를 줄이고 가까이 가서 멈춰 섰다. 앞을 보니 어미 산토끼 한마리가 웅크리고 앉아있다. 천천히 다가가서 내려다보니 어디가 아픈지 미동을 않고 앉아있다. 손을 내밀어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니 나를 무서워하며 발버둥을 친다. 다시 내려놓을까 생각을 하는데 손등에 뭔가 액체가 묻어있다 차 불빛에 보니 붉은 피다. 자세히 보니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다. 이대로 방치하면 차에 치어죽거나, 물에 빠져죽기 십상이다. 주위 양쪽에는 한쪽은 호수물이, 건너편에는 바다물이 인접해 있다. 불쌍한 생각, 측은지심이 생겨났다. 내가 돌보아주어 살려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부드럽고 조심스레 안고 차에 돌아와 시트 밑바닥에 티슈와 부드러운 종이들을 깔고 앉혔다. 다리를 다쳤으니 시트바닥에 놓아도 움직이지를 못하고 가만히 있다. 몇분을 지체하다보니 교회 예배시간에 늦을 것 같다. 부지런히 가속페달을 밟고 교회에 도착해서 기도와 예배를 드렸다. 집으로 돌아와서 깨끗한 종이를 깔고 흐르는 피를 닦아주고 바세린을 발라주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박스를 찾아 푹신하게 종이를 펼쳐 깔아주고 먹을 것(당근, 양배추, 오이 등을 넣어주고 물도 컵에 담아)을 주었다. 흥부는 처마에서 떨어진 제비새끼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해주고 돌봐주었다는데, 나는 산토끼의 부러진 다리를 치료하고 돌봐주니 기분은 흥부가 된 기분이다. (착각은 자유라고 했다.)
며칠을 정성껏 돌보며 소, 대변의 배설물도 치우고 종이도 자주 갈아서 깔아주었다. 그리고 야채도 신선한 것(내가 먹으려고 사다놓은 것들)로 주었다. 며칠이 지나니 토순이(알고 보니 암놈이다. 그래서 나는 토순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는 생기가 돋고 먹는 것도 잘 먹는다. 오늘은 아침 일찍 토순이에게 새로운 먹이들을 넣어주었다. 잠시 후에는 토순이를 자기의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돌아가라고 방사 할 예정이다. 이제는 다리에서 피도 안 나고 펄떡 펄떡 뛰며 점프도 한다. 커다란 박스가 좁다고 퍼덕 댄다. 나도 아침식사를 마치고 토순이에게 다가갔다. 덮개를 열고 토순이를 집어 올렸다. 자기를 죽이는 줄 알고 발버둥치고 난리다. 조심하여 안고 나와 뒷정원 숲으로 다가갔다. 정원수가 우거진 나무 밑으로 토순이를 놓아주며 “토순아 잘가라, 이제는 조심하고 다치지 말어라” 하고 이별의 인사를 보냈다. 땅위에 내려놓고 어서 가라고 해도 토순이는 잠시 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고 떠나질 않는다. 아마도 자기의 상처 난 다리를 치료하고 돌봐준 은혜(?)를 아는가 보다. 그래서 떠나기가 섭섭했나보다. 잠시 후 토순이는 천천히 깡충대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상처 난 다리로 고생하는 산토끼, 토순이를 보고 연민과 측은지심이 생겨나서 당연히 할 도리를 했다.
연민(憐憫)은 불쌍히 여김, 가엾이 여김의 뜻으로 사랑과 구제하려는 마음에서 오는 정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맹자의 사단설(四端設)에 나오는 말로 불쌍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어진(仁)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성경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연민과 자비심이 깊은 분이셨는지를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마태5~7장)로 제자들과 따르는 많은 이들을 가르치신 다음 몸소 실천하며 보여주셨다. 나병환자를 비롯해 불치의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들을 고쳐주셨고 굶주린 이들에게 기적을 일으켜 빵을 먹여주셨으며, 누가복음 10장29~37절에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치는데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를 돌봐준 일이 기록되어있다.
지난 4월1일은 부활주일이었다. 예수님은 죄악 속에 빠진 우리 인간들을 대속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십자가에 못 박는자들을 향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라며 간절히 기도드렸다. 이처럼 예수님은 적대자들에게까지 연민의 정을 느꼈음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과 자비심이 이러한 연민과 측은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유교의 덕목인 측은지심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덕목인 사랑과, 불교의 자비 사상과 다름없음을 알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위대한 성인들은 가장 보잘것없고 나약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연민의 정을 가지고 그들을 돕고 구제해야한다고 한결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그 가르침을 본받아 인간이 아닌 짐승에게도 이러한 경우는 똑같이 적용되고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기에 말 못하는 짐승, 상처를 입은 불쌍한 토순이에게 나도 해야 할 그 도리를 했을 뿐이다. 오직 토순(산토끼)가 건강하게 잘 살기만을 바랄뿐이다.
요즘 우리사회는 아직도, 산에서 산토끼를 잡을 때 수십, 수백명이 줄지어 토끼사냥, 토끼몰이를 하듯이, 어느 특정인을 향해 언론을 호도하고 토끼몰이를 일삼고 있다. 이제는 산에 산토끼는 물론이고, 더는 선하고 자유로운 영혼들을 몰아세우고 잡아 족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야생의 자유를 즐기며 순하고 맑은 목소리를 내는 산토끼 같은 영혼들을 어느 길모퉁이에서야 만날 수 있을까……………….
<사진> 처음에 토순이(산토끼)가 나의 집에 왔을 때는 피를 흘리고 기운이 빠진채 기진맥진한 모습을 보였는데, 며칠의 요양을 하고 먹을 것도 잘 먹고 난후, 며칠 뒤에는 토순이의 눈망울도 똘망똘망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토순이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보았다. (세번째 사진이 마지막 날 집을 떠나가 전의 건강한 모습의 토순이)
<칼럼니스트 / 탬파거주> myongyul@gmail.com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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