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주 작가의 삶의 이야기> 소중한 악연

<박은주 작가의 삶의 이야기> 소중한 악연

불교에서는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 한다’
300번을 죽었다 깨어나야 현세에 옷깃을 스칠 수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부부의 인연은 8,000번을 죽었다가 환생해야 만나는 관계라고 하니 실로 엄청난 세월의 화합이라고 하겠다.

부부에 관해서는 성경말씀에도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고 남편들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였다.
또한 유대인의 ‘탈무드’라는 책에서는 첫 번째 인연은 하늘의 맺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우리들의 옛 어른들은 ‘부부란 돌아누우면 남’이라고 했다.
그 말은 뒷밭침이라도 하듯이 우리들은 이혼하면 남일뿐만 아니라 철천지원수가 된다.

얼마 전에 나는 이혼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40대 초반의 부부를 만났다.
결혼 생활 15년, 악연으로 이어진 지옥 같은 생활이었다고 그 남편은 말하였다.
그나마도 아들딸이 이어주는 울타리로 인하여 끈질기게 버티어 왔었지만 결국은 악연의 끝장을 내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몸에 박혀있던 종양을 완전 제거한 듯 살맛이 나더라고 한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여덟 살, 열 살 난 딸과 아들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가 없었던지 남편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사적으로 자식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에 혈안이 되었다.
심지어는 그 자식을 낳아준 아이들의 어머니를 흉악한 악녀로 만들어 감언이설로 아이들 앞에서 모독을 퍼부어 대는 심한 학대가 계속 되었다.
아이들을 빼앗긴 부인은 비애와 분노로 이를 갈며 증오를 씹고 있다.

왜 우리들의 이혼한 부부들은 철천지원수가 되어야 하고 상대를 저주하고 증오하여야만 하는지.
자식을 사랑한다면 그들이 자라면서 겪는 갈증과 후유증도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
설사 당사자들은 헤어져 원수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이 커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증오의 대상으로 삼게 할 수는 없다.

한 예가 있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아 세상에서 당신들만이 아이들이 있는 듯 만방에 자라하며 온 갓 정성을 퍼붓던 두 내외가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남편의 외도가 잦아지면서 15년 연하의 여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극비리에 동거를 하고 있다가 사회에 노출되자 남편은 부인이 바람이 났다는 각본 각색을 그럴 듯하게 연출하여 사회의 동정까지 받으며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부인의 등을 밀어냈다.

친정은 물론, 약자일 수밖에 없었던 그 부인은 ‘아니다’라고 버선목처럼 뒤집어 보일 수도 없어 억울한 오명을 안고 결혼생활 14년의 종지부를 찍었다.
목숨을 달라고 하여도 아깝지 않다고 정성 드려 기르던 아이들도 뺐기고 벼랑 끝에 매달린 처절한 아픔을 안았다.
스스로 목을 치기에는 너무도 억울하였다.
제기의 발버둥을 친 그 부인은 미국으로 왔다.
바닥에서 시작하여 새로운 발 밭침을 굳혔다.
또 14년의 세월이 흘렀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계모가 아이들을 거리로 내 몰았다는 소리는 그 부인의 피를 분노로 끓게 하였다.
부인은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리고 왔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부인을 어머니로 생각하기보다는 어머니가 자신들을 버렸고 아버지의 재산을 빼돌리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처럼 생각했다.
때때로 그 부인은 뒷마당에 나가 창자부터 끌어올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댄다.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하면 저럴까 가슴이 저민다.
그러나 때때로 그 부인은 내리 사랑이라고 그러한 아이들을 탓하지 않았다.

아이들이 미국에 와서 산지도 십 오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아이들에게 있어 그 부인은 아버지를 배신한 부정한 여인이고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다.
부인과 헤어진 후, 그 남편과 새엄마, 그리고 시집식구들이 얼마나 그 부인을 헐뜯었는지는 모르나 빨갱이 사상처럼 골수에 깊숙이 맺힌 아이들이 원성은 한계를 넘어서 급기야는 부인의 체중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영광로를 머리에 이게 하였다.

‘하나님 제가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자식을 가르지 못한 죄의 대가로 자식에게 버림받은 부인은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의 대한 삶의 의욕을 송두리째 짓밟혔다.
부인은 스스로 목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부인은 남편에게서 버림받고 자식에게서 버림받은 고통을 운명이라고 돌리고 자식들과의 인연을 끊었다.
과연 이 비극은 누가 책임을 저야 하는지?

나는 미국인들의 이혼한 가정을 많이 보고 있다.
그들은 상대방을 헐뜯지 않는다. 좋은 점을 말하고 헤어진 뒤에도 좋은 친구로 남는다.
특히 생일 때 크리스마스 때면 그들은 꽃다발을 보내기고 하고 저녁식사에 초대하기도 하고 부부의 인연을 마감한 대신에 친구로 남아서 연인을 소개시켜 주기도 하며 행복을 빌어준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신뢰와 존경심을 갖게 한다.
참으로 아름답고 현명한 모습이다.
헤어짐이 악연이라고 하더라도 8,000번의 환생의 만남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악연까지도 소중하게 가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후세에 또 다른 악연으로 맺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세에 그 업보를 정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090/2017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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