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관칼럼> 김현철 기자의 80회 생신과 이승 고별식에 붙여

<홍순관칼럼> 김현철 기자의 80회 생신과 이승 고별식에 붙여

저는 이 분을 지난 30 여 년 동안, 선배로 함께 이민의 삶을 살아오며 하늘이 이 분을 우리들 속에 보내주신 것을 감사해왔습니다.
즉, 이 분이 우리들 속에서 살아온 공생애 ‘Public Life’ 란, 자기를 넘어 시대적 아픔과 눈물의 삶을 살아 온 것을 말합니다.
시대적 분노와 정의를 향한 외침, 억압당한 인권, 실종된 평등을 위해 고투해온 것들 말입니다.
이 분이 자기만을 위해 살아 왔다면 제가 오늘 12시간을 달려 이 자리에 참석했겠습니까?
이 분은 이 자리에서, ‘자연인 누구가 아니라’ 이 분이 이제껏 살아온 것의 전부 즉 시대의 어두움을 깨우려는 정의로운 분노와, 저항적 실천적 언론인으로서의 인간, 그 전부를 말합니다.
해먹기, 사이비 언론의 혼탁한 세태 속에서 정론을 펴내는 예리한 펜 끝을 굽히지 않은 외로운 길 말입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어느 분이 죽어도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죽은 그분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었을 때, 그때에 가서야 드디어 그 분이 죽었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육체로는 죽었어도 그 분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불멸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이 분이 어느 날 홀연히 세상을 떠난다 해도 많은 분들의 기억 속에서, 문자의 공간속에서 살아 증언할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기억하는 불멸의 혼들이 한 둘이 아닌바, 시성詩聖 ‘타고르’. 위대한 혼 ‘간디’. 한 멋스러운 사람(풍유인) ‘함석헌’. 증오와 폭력으로 부터의 자유인 ‘만델라’. 흑인의 해방자 ‘마틴 루터 킹’ 등 …
김현철님 역시 한국언론 역사의 어느 페이지에서 기억될 분입니다.
이 분은 이제껏, 사회와 역사에 책임지는 지성-언론인 리영희 교수를 연상케 하는 외로운 길을 걸어 오셨기에 후배들의 기억 속에 오래 오래 살아남을 것을 확신합니다.
저는 사람이 같은 밥을 먹어도 그가 누구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만가지로 나타나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곤 합니다.
군인이 먹으면 ‘전쟁’, 사기꾼이 퍼먹고 나면 ‘사기치기’, 소리꾼속에 들어가면 ‘불멸의 울림’으로, 화가가 먹고 나면 ‘극치의 예술작품’이 솟아납니다….
아울러, 이 시대의 질곡과 암울함은 언론인인 이 분속에 들어가 ‘분노와 저항의 분수’로 솟구쳤습니다.
오늘 우리가 같은 시대를 함께 살았지만 언론인으로서 이 분이 살아 온 길은 빈들의 소리였기에 차별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란 하늘이 그의 입술에 맡긴 말을 거침없이 토해내는 것입니다.
프랜시스코 교황을 사람들은 이 시대의 기적, 이변, 예외, 희망, 충격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그를 거세하고 싶어 하는 내부적 적수들이 가득하다는 것이 슬픈 현실이기도 합니다.
‘해먹는 대부분의 어용 언론인’이 아니었기에 오롯이 ‘정론正論’만을 펴 온 이 분은 이 세상의 ‘사악邪惡’과 불화할 수 밖에 없었고 각을 세우고 길을 가야만 했습니다.

저는 이 분이 걸어온 그 길이 좁은 길, 소외된 길이었기에 갈채를 보내는 것입니다.
플로리다에서는 ‘귀족 팜 나무 Royal Palm Tree’ 가 길 양편에 도열해 있는 장엄한 풍경을 만날 수 있습니다….즉, 키 높은 종려나무들이 하늘을 찌르며 그 길 위에선 우리들에게 기립박수 ‘Standing Ovation’ 을 보내는 것입니다.
오늘 이 밤에, 저는 이 분이 이제껏 살아온 전부, 앞으로 살아가실 모든 날들을 향해 기립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가 산다면 하늘이 명한 삶을 사는 것이고, 우리가 죽는다면 이제껏 산 것을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 것이 없는 자는 죽을 것도 없는 정신적 가난을 맏이하게 됩니다.
즉, 위해서 살 것이 없는 사람은 위해서 죽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Nothing to live for, nothing to die for.
이 분은 생의 양면(생사일여生死一如)을 힘차게 살아온 증언자임을 여러분께 호소해 마지않습니다. <993/2015-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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