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오-매 단풍 들겄네”의 ‘골불은 감잎’과 ‘골붉은 감잎’

<김현철칼럼> “오-매 단풍 들겄네”의 ‘골불은 감잎’과 ‘골붉은 감잎’

최근 미 동남부 중도시(동포 인구 약 10만)에 들렸을 때 현지 여성시인협회 회원들의 요청으로 ‘영랑시’에 관한 약 1시간 동안의 강론을 할 기회가 있었다.
서정시에 관심이 있는 분들 중 현장에 없었던 분들을 위해 여기에 간추려 옮긴다.
‘영랑시’는 대부분이 쉬운 우리말로 알기 쉽게 쓰인 시 같지만 읽어 보면 김소월, 정지용 처럼 초등학생이 읽어도 깊이 생각할 것 없이 그 때 그 때 소화가 되는 시가 아닌 몇 번씩 곱씹어 봐야 어슴푸레 머리가 끄덕여지는 쉽지 않은 시다. 당연히 일반인들에게는 소월이나 지용에 비해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시일 것이다.
그런데 영랑의 직계 후배시인으로 알려진 미당 서정주는 1950년도 3월호, 월간 ‘문예’지에 기고한 ‘영랑의 서정시’라는 글을 통해, 영랑과 지용을 비교하면서 “정지용의 시가 관능적, 감각적, 기교적 특성 때문에 대중들에게 유명해 진데 비해, 김영랑의 시는 한국적인 정서를 차분하고 섬세하게 펼쳐 내기 때문에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시의 가치는 더 위에 놓인다”며 영랑을 제1급의 민족시인으로 평가했다. 그는 훗날 어느 문학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도 ‘지용의 시가 나일론이라면 영랑 시는 한산 모시’라며 영랑을 우리 정서를 펼쳐 내는 민족시인으로 자리매김한바 있다.
반면 많은 문학평론가들은 영랑의 시를 싯적 자아의 내향성에 치중한 나머지 현실적 삶과는 무관한 아름답고 여린 정서에 집착하고 역동적인 현실을 외면해서 맹목적이고 정태적인 삶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고 비판한다. 또 감미로운 감상의 정서를 자아내는 싯적 세계를 설정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했다는 비평도 뒤따랐다.
그러나 영랑시집(1930)이 태동한 초기를 지나서 1939년 이후인 중기와 후기에 이르면 영랑이 민족의 현실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며 참혹한 일제 압제하에서 자신의 “외로운 혼을 지키기 위해” 고심했는지 그 처절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다.
마음 독한 결의를 보여 준 ‘독을차고’, 죽음을 불사한 절의가 나타난 ‘춘향’, 현실과의 연을 끊는 ‘거문고’, 울분을 토하는 ‘한길에 누워’, 자탄의 ‘우감’등 일제 강점기 시절의 민족문학 정신의 장관을 이룬 항일 시들을 읽어보노라면 영랑이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했다’는 일부 논평은 관련 평론가들이 초기 시만 보았을 뿐 중기에서 후기에 이르는 시는 접해 보질 못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항일시인 이육사(본명 이원록)의 친동생인 당대의 가장 예리한 문학평론가 이원조(1909~1955)는 1930년대 초 영랑시집이 첫 선을 보이자 “… … 이 시인이 자꾸 이대로 나가면 뮤즈(Muse/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시, 음악, 극, 미술을 지배하는 아홉 분 여신들)마저 질투할 것이다. 칭찬도 공격도 할 필요 없이 그냥 둘 수밖에.”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영랑시를 악평하는 평론은 위에 밝힌 ‘현실도피’ 이외에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오늘은 영랑의 초기시 ‘오-매 단풍 들겄네’를 풀어 보자.

“오-매, 단풍 들겄네”

장광에 골불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듯이 치어다 보며
“오-매 단풍 들겄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겄네”

여기에서 평론가들은 호남 방언 ‘오-매’대신 표준어나 다른 지역 방언 어느 것을 갖다 놓아도 이 시의 정서를 100% 그대로 살릴 수가 없다고들 말한다. 이 시에 가장 알 맞는 단어가 바로 ‘오-매’라는 것이다. 이 시가 발표된 후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는 ‘오-매’가 호남에 국한하지 않고 전국적인 단어로 자리 잡은 듯하다.
이 시를 다른 분들이 인용할 때면 대부분이 ‘장광에 골붉은 감잎…’으로 쓰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추석이 다가온다니 단풍을 연상해서 ‘골불은’을 ‘골붉은’의 오타쯤으로 보는 것 같다.
여기서 말하는 ‘골’은 물체에 얕게 패인 줄이나 금을 말하는 것이니 ‘골이 붉은 감잎’이 아니라 물이 올라 골이 통통 ‘불어있는’감잎이라는 뜻이다. 강진 지역의 감잎은 대부분이 추석 전에 붉어지는 법이 없고 추석이 지나서 붉어지기 시작한다.
즉, 누이는 단풍들어 떨어지는 감잎을 본 게 아니라 물기 오른 초록색 감잎이 자주 부는 바람에 떨어진 것을 보고 놀라고 있는 것이다.
바람마저 잦아 걱정인 나이 찬 여동생은 오빠를 보며 “오-매 단풍 들겄네” 라 외쳤다. 이미 추석은 다가오고 있는데 오빠는 빨리 재혼(14세에 결혼한 영랑은 1년 후 상처를 한다)을 해서 길을 터 줄 생각을 안 하니 내 혼기는 또 해를 넘겨야 하는가?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리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겄네”

골불은 감잎처럼 물 오른 얼굴의 누이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미 오빠는 누이의 마음 속 깊이 까지 들여다보고 있다. 상처한지 몇 해가 지나도 아직 나부터가 홀아비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으니 나야 말로 너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로다.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겄네”

영랑 시중에는 이렇게 시의 행간을 헤아려 풀이하기 전에는 얼른 이해가 안 되는 시가 많다.
덧붙여 얘기하고 싶은 것은 영랑 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의 경우도 위의 ‘골불은’을 ‘골붉은’으로 잘 못 쓰듯이 ‘소색이는’을 ‘속삭이는’으로 잘 못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햇발이 어루만지듯 사뿐히 내려앉아 은밀하게 돌담과 소색이는데 남녀가 속삭이듯 소리가 들릴 수는 없는 법, 그래서 시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소색이’는 강진 방언으로 돌담과 햇발의 은밀한 대화를 표현한 것이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내마음 고요히 고운봄 길위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싶다.

새악씨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을 살프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싶다.

이 시에서 ‘소색이는’을 ‘속삭이는’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싶다’를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로 또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싶다’를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싶다’로 쓰게 되면 영랑 시의 특성인 음악성이 죽어버린다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시 낭송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위 두가지 다른 단어를 대입해서 두 어 차례씩 소리내어 읽어 볼 때 영랑 시에 있어서의 음악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필자는 영랑시인의 3남임) 201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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