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5.16은 미국의 작품이었다 (2)

<김현철칼럼> 5.16은 미국의 작품이었다 (2)

한국일보(1990,11,28) 기사, ‘하우스먼의 회고록’을 보면 하우스먼은 “1961년 3월 1일 실제 쿠데타가 있기 45일전에 나는 한국군내의 쿠데타 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나는 한국군 친구들로부터 얻은 정보, 또는 불쑥 찾아가서 대화 중 캐낸 일들을 분석한 후 일련의 심각한 상황을 종합할 수 있었는데 이 상황이 지나가는 바람이 아닌 실제폭풍일 것이라는 것을 한국군 육군본부 김형일 참모차장(61년 3월까지 재직)이 확인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하우스먼은 여순반란 사건 진압을 지휘할 때 박정희를 구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위의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미국은 쿠데타 발생 훨씬 이전에 쿠데타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전혀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방조 내지 교사한 인상을 주었다. 더구나 유엔군 사령관의 특별보좌관인 하우스먼이 알고 있는 그 엄청난 사실을 매그루더 사령관이 몰랐다면 말이 되는가?
실은 ‘한국 군대를 동원하면 무력충돌로 희생자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쿠데타 진압을 거부한 윤보선 대통령 등 몇몇 국내 정치인들도 박정희와 사전 내통(민의원 의장 곽상훈)하는 등 쿠데타 자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쿠데타 군인들이 한강교를 건너 서울 시내로 들어오고 있을 때 현장 목격자는 쿠데타군 앞에 ‘미군 헌병차’가 선도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 날 이른 아침 하우스먼은 장도영 참모총장을 만나기 위해 육군본부로 갔다. 그는 여기서 박정희를 만난다. 그날 이른 새벽 박정희와의 이 짤막한 만남이 있은 후 두 사람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는다.(한국일보 1990,12,5)
하우스먼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의 혁명위원회 측은 연락관(한국군 대위)을 통해 구두 또는 서면으로 많은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물어왔으며 하우스먼도 그 연락 장교 편에 몇 가지를 강력히 권고한다. 그것은 미 8군안에 혁명군을 들여보내지 않는 문제, 혁명군의 팔에 두른 하얀 완장을 제거하는 문제 등 비교적 단순한 형식상의 문제에서부터 한국군 장성들의 신상문제, 박정희의 얼굴 드러내기 등 까다로운 정치문제에 이르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특히 하우스먼은 박정희에게 적어도 한 개 이상의 공식적인 최고 직책을 가져야 하며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모자를 빼앗아 써야 한다고 말했다.<한국일보 1990,12,12>
5.16 이틀 후 하우스먼이 8군 켐퍼스 안의 자기 집에 찾아 온 박정희를 만났을 때 박정희는 하우스먼에게 “혁명위원회는 하우스먼 당신 친구들이 거의 전부이니 실은 당신네들(미국) 혁명이요”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미 CIA 한국지부장 씰바는 5월 15일 오전에 김종필, 다음날에는 박정희를 자주 만났으며 그 후로는 박종규(후 청와대 경호실장)와 더욱 자주 만났다.
하우스먼은 그의 회고록에서 쿠데타설이 나돌던 시점에 육본작전참모 부장으로 있는 박정희를 찾아가 많은 대화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2년 개헌을 둘러싼 부산 정치 파동 때에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의 출동을 명령하자,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군의 통수권이 미군에 있음을 환기시키면서 군의 부산 출동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 때 이용문 소장과 박정희를 비롯한 일단의 군인들은 유엔군사령관과 미 8군사령관의 지원을 받아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었다.
53년 5월, 미국은 이승만이 계속 휴전협상을 방해하자 52년의 이승만 제거 계획을 더욱 강경하게 바꿔 군부에 의한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이른바 에버레디 계획(Ever ready Plan)을 수립했으며 미군수뇌부의 지원을 받아 박정희가 이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말’지) 그렇다면 5.16 쿠데타는 이미 9년 전부터 착착 준비해 왔다는 사실인 것이다.
미 CIA국장이었던 엘런 덜레스(Allen W. Dulles)는 1964년 5월 3일 영국 BBC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제가 재직 중에 CIA의 해외 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바로 이 5.16혁명이다. 미국의 일부 지도자가 지지하고 있는 장면 내각은 부패해서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민중의 기대에 응하지 못했다. 참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했다. 바로 미국이 5.16에 개입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쿠데타 성공 후 군사정권은 자주적 발전을 지향하기 보다는 “용공분자”를 색출, 체포하는 일에 최대의 역점을 둠으로써 자주적 지향을 보인 4월 민중항쟁의 주도세력을 가장 철저하게 탄압한다. 이것은 바로 미국이 쿠데타에서 얻고자 했던 한국민족주의의 제거와 일치하는 것이다.
해제된 미국무성 비밀문서에 따르면 5.16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미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에 처음 방문했을 때 전례 없이 대통령을 대신해서 잔슨 부통령이 공항까지 나와 박정희 의장을 환대했다는 사실은 위에 지적한 모든 내용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끝) Kajhck@naver.com <2013-10-31>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