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5.16은 미국의 작품이었다 (1)

<김현철칼럼> 5.16은 미국의 작품이었다 (1)

– 김구 등 항일 민족주의자, 진보세력 제거가 미국의 목적 –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한국을 대 소련전선의 최전방 군사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친미파가 아닌 상해 임시정부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모든 국내 민족주의 민중세력 그리고 진보세력을 약화시킬 방안을 세운다. 오늘 날 미국이 부르짖고 있는 ‘세계화'(세계단일정부를 목표로 하는)를 이루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각 나라의 민족주의인 것이다. 애국자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가 미 CIC(방첩대) 요원이었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기 위해서 미국은 우선 친미파 군과 경찰을 양성하기 위해 일본에 충성했던 군과 경찰 등 친일파들을 재기용해서 초창기 대한민국 군-경 지도부를 완벽하게 통제하고 양육하는 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친일을 해서 민족을 한 번 배신했다면 친미도 쉬운 법이고 또 친일파 처단이 두려워서라도 친일파들이 친미로 기울어 실권을 쥐려든다는 게 주한 미군사고문단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그런 목적으로 미군정청을 시작, 한국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한국군 전 병력 및 경찰, 그리고 한국 정부의 중요 행정부서에는 미군사고문단이 파견돼 명실 공히 한국군 및 대한민국 정부 출범의 산파 역 내지 대부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한국 정부와 한국 군,경의 일거수일투족이 미군사고문단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고 보고되어 왔던 것이다.
6.25 직전, “미국의 극동방어선은 일본”이라며 주한 무장 병력 전원을 일본으로 철수시켜 김일성의 남침을 유도했을 때도 5백여 명의 비무장 미군사고문단만은 한국에 남아 꾸준히 한국 군,경을 통제하는 임무에 충실해 왔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1946년 한국에 첫 발을 디딘 제임스 하우스먼(James Harry Housman) 미 육군대위는 한국군 초창기인 조선경비대(총사령관 베로스 미군대령) 집행국장으로 근무했으며 조금 후 베로스 대령이 미군정의 제주도지사로 전임되자 후임 총사령관 대행으로 있으면서 실제로는 조선경비대총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한다. 이어 미 군사고문관, 미 군사고문단장의 고문, 채병덕 한국육군참모총장 고문, 이승만대통령의 군사고문을 거치면서 한국군 형성과정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마음대로 움직였고 “한국군의 아버지”임을 자칭했다.
이를 계기로 이형근,채병덕,정일권,백선엽,박정희 등 모든 일본군 장교 출신들 및 고위 정치인 등이 하우스먼을 ‘국군의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하우스먼의 지시는 곧 미국 정부의 지시로 받아들이게끔 됐다.
한편 일제 때 항일투쟁을 벌였던 애국자 집단인 광복군 출신은 하우스먼에 의해 냉대를 당했는데 그 이유는 일본군처럼 혹독한 군사훈련을 거치지 않았다는 것과 일본군 출신에 비해 민족주의 의식이 너무 강하고 반공의식은 약하다는 것이었다.
하우스먼이 친일 장교들 중 특히 박정희를 눈여겨본 이유는 민족을 배신하고 혈서를 써서 만군신경군관학교(2년제)에 입학한 철저한 친일 경력과 1등으로 졸업, 일본육사 3학년으로 편입 후 3등으로 졸업했으며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 상을 받은 우수성, 남로당 한국군책으로 있을 때 일어난 여순반란 주모자의 하나였으나 군내 남로당 조직과 명단 일체를 수사기관에 내놓는 철저한 배신행위로 수사당국에 적극 협조함으로써 사형을 면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집권할 경우 처형될 수밖에 없어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변신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 한국군 내 중견 간부들에게 신망을 받는 청렴하고 똑똑한 군인 등의 이미지는 다른 한국군 장교 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미국이 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여건을 갖춘 존재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우스먼의 보고서는 미국 정부에 직보되었고(하우스먼의 회고록), 박정희의 빨갱이 경력을 우려하던 미국 정계지도자들의 의구심을 희석시키는데 기여한다. 이 공로로 맥나마라 미국방장관은 하우스먼에게 공로표창장을 주었고 이 후 미국의 대한정책은 하우스먼의 보고서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1958년 3월 박정희는 소장으로 진급하는데 여기에도 역시 미고문단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1959년 7월 박정희는 6관구사령관으로 임명된다. 6관구 사령관의 자리는 서울 일원의 군부대를 총지휘하는 수도권 방위 임무를 띠고 있다. 박정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쿠데타 계획을 세운다. 무능, 부패를 이유로 장면 내각을 몰아낸 1961년의 5.16 쿠데타는 실은 장면 내각이 들어섰던 1960년 8월 12일 훨씬 전부터 미군사고문단의 묵인 내지 교사로 계획되고 있었으니 “장면 정권의 무능, 부패”란 한갓 국민을 속이기 위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군사 쿠데타에 대해 보인 미 대사관(성명)이나 주한 미군사령부의 첫 반응은 “합헌정부를 지지한다”는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이 윤보선대통령을 만나 ‘군을 동원해서 쿠데타를 진압하라’고 주장함으로써 미국이 쿠데타를 사전에 몰랐다거나 지지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만드는 양면 작전(2중외교)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편 미 국무성은 미 대사관의 성명에 대해 사전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부정하면서도 쿠데타에 대해 반대하지도 않은 채 노코멘트의 태도 내지 불간섭주의를 표방한 것도 양면작전의 하나라 보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일본의 시사주간지 주간신조는 5.16 직 후 “미 CIA는 약하고 무능한 장면내각을 무너뜨리고 강력한 반공정부로 교체시키기 위하여 한국군부에게 쿠데타를 감행하도록 교사하였고 그 후 그런 전략을 은폐시키기 위해 미국무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서울의 미 대사관과 미군 당국에 장면 지지 성명을 발표하도록 했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는데 이는 후에 예리한 비판기사로 박정희의 미움을 사 항소심이나 대법원도 거치지 않고 지법의 사형판결이 나자마자 사형집행을 당한 당시의 엘리트 언론인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쿠데타는 미CIA가 한 짓”이라며 화를 낸 것과 일치하는 대목이다.(계속) kajhck@naver.com <2013-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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