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언론의 자유와 책임

<김현철칼럼> 언론의 자유와 책임

족지분수足知分數라는 말은 항상 사람을 겸손하게 처신하도록 하는 힘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족자는 흡족할 족(발 족자), 지는 알 지, 또 분수의 분은 분별할 분(나눌 분), 수는 수학 등에 쓰는 셈 수, 곧 분수라는 뜻은 자기 신분에 알 맞는 한도를 말한다. 결국 족지분수란 자신의 분수를 흡족(충분)히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학교 성적이 최 하위권인 아들이 제 분수를 모르고 눈만 높아 일류대학을 가려고 억지를 쓸 때 어버이는 그 자식의 앞날을 위해 족지분수를 터득하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겠는가.
옛날 뼈대있는 집안에 가면 간혹 ‘족지분수’라는 한문명구를 액자에 넣어 집안의 눈에 잘 뜨이는 곳에 마치 무슨 가보나 되는 듯 걸어 놓은 걸 볼 수 있었다. 다 자식들 사람되라는 가정교육의 한 방법인 줄 안다.
내가 발행인 겸 편집인 시절, 한겨레저널을 헐뜯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이유는 뜻있는 동포들은 거의가 알고 있듯이 그들 대부분이 자신의 부정이나 옳지 않은 일들이 신문에 보도되어 신문사에 감정을 갖게 된 사람들 또는 그 친척이나 친구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헐뜯을 자료가 없었던지 “여기자와 열애 중으로 본부인과 이혼이 시간문제”(내 평생 이혼을 모르고 사는데…)라느니, “자칭‘한의학박사’(미국에서는 클리닉에서 근무하는 침술사도 닥터라고 부르지만 내 자신이 ‘한의학박사’를 자칭한 적이 전혀 없다)라고 한다”느니 별의별 유치한 거짓말을 조작해 자기들이 만들고 있는 인쇄물에 실어 퍼트리는, 반대를 위한 반대론자들과 무슨 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당시 한겨레저널 폐간을 최일선에서 격렬하게 부르짖던 동포 한분이, 상사인 아무개씨, 즉 당시의 동지로부터 엄청난 사기를 당하자 하소연 할 곳이란 역시 한겨레저널 밖에 없다면서 사건의 자초지종을 신문에 호소, 한풀이를 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한겨레저널은 당시 약자 또는 이렇게 당한 자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언론 기관임을 신문폐간운동에 가담했던 인사들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반증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한겨레저널이 전혀 실수가 없는 신문이었다는 뜻은 더욱 아니다. 세계 최대의 신문이라는 뉴욕타임스도도 간혹 실수를 하는 터에 어디 감히 완벽을 바랐겠는가.
실수를 더욱 줄이기 위해 겸손한 자세로 책임질 수 있는 신문 제작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비판 기사를 다루는 기자를 놓고 “당신은 완벽한 인간이냐?”고 항의하는 순진한 독자, 또 노기자는 나이 값(?)을 해서 날카로운 비판기사는 다루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처구니없는 독자들을 위해, 국내의 법관들을 예를 들어 몇 마디 사족을 달겠다. 이러한 것 까지 설명해야 하는 게 해외 동포사회의 현실임을 어쩌랴.
판사가 같은 인간인 죄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은 판사가 완벽한 인격자여서가 아니라 일반인에 비해 법을 전공했고 고시에 패스해서 판사라는 직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판사가 40년 가까운 노련한 경력으로 판결하는데 꼭 사형선고를 받아야 마땅할 극악범의 경우, 이제 판사가 늙어 ‘할아버지 판사’가 되었다 해서 10년 징역형이나 또는 인생을 살아보니 “좋은게 좋은 게야”하면서 무죄를 선고 한다면 이미 그 판사는 공공질서확립이 생명인 법관의 자질을 의심받아 무능한 판사로 낙인찍힐 것이다.
법조계가 아닌 어느 분야라 하더라도 오랜 경험으로 신중과 유연을 터득할 수는 있을망정 그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다.
누가 뭐래건 신문이 해야 할 일만을 틀림없이 챙겨 신문의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해 오기에 비판 받은 당사자 등은 왜 그런 걸 좀 적당히 봐주지 않느냐? 며 당시의 한겨레저널을 싫어하는 사람도 그만큼 많았을 것이오, 반대로 사회질서 확립을 위해서는 그러한 신문은 어느 사회에나 꼭 하나씩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의파 독자도 많았던 것이다.
이토록 찬반이 반반씩 엇갈린다면 그런대로 당시 한겨레저널은 꼿꼿한 언론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었다는 걸 반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보다 내가 당시 언론인으로서 크게 부끄럽지 않았던 이유는 국내 언론사에서 오랜 세월을 근무했던 60대의 노련한 언론인 아무개(전 서울의 일간신문 부사장 역임) 선배 등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내 평생 신문도 많이 보아오지만 그토록 솔직하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쓰는 신문다운 신문은 처음 본다”면서 진심으로 격려해주었기 때문이다.
그 분야의 베테랑 이상 그 분야를 제대로 평가할 사람은 없을 터이다. 언론의 언자도 모르면서 신문기자가 어떻고 기사가 어떻고 하며 비방하는 소리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겠는가.
요즈음 물질에 영합해 참 언론이기를 포기하는 타락한 언론이 너무 많은 현실이야말로 같은 언론계 선배 입장에서 서글프고 창피할 따름이나 그보다는 그러한 신문을 올바른 것으로 믿는 일부 독자의 시각이 더 큰 문제인 것이다.
윌슨 대통령의 중요한 연설문 중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나는 언제나 최대의 <언론자유>는 사회에서 가장 안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자가 바보스런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에 대한 최선의 방책은 그가 마음대로 지껄이게 해서 자신이 바보요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웅변이 아닐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족지분수의 경지에 들어서서 “내 주제에 감히 이 말을, 이 행동을 해도 될까?”하고 재삼 숙고하는 신중성과 겸허성을 지닐 때 이 세상은 보다 평화롭고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kajhck@naver.com <899/2013-10-08>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