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내가 본 마이애미한인사회의 옛 모습 (17)

<김현철칼럼> 내가 본 마이애미한인사회의 옛 모습 (17)
한국전통문화 풍물놀이, ‘장승패’ 창립

마이애미 지역 하인사회가 너무 작다보니 동포 청소년들이 한데 어울릴 기회나 장소가 없었기에 상당수의 가정이 타민족 사위나 며느리를 보게 되면서 부모들은 은근히 속 앓이를 했다.
당시만 해도 한인교회가 한 두 개 정도인데다 대부분의 동포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았기에 우리 청소년들이 어울릴 수 있는 상대는 타민족이 대부분이었다.
약 30년 전의 일이다. 아들과 딸들이 모두 같은 도시에 사는 어느 분의 푸념이 잊히질 않는다. 딸자식이 결혼하자 서양사위가 딸과 함께 처가에 한두 번 들리다가 언어와 풍습 등의 차이를 이유로 차차 발 길이 뜸해지고 얼마 안 가서 1년에 한 번 보기가 어려워지더라는 것.
특히 서양 며느리는 결혼 후 첫 번 다녀가고는 그 후 아들놈만 한두 번 오더니 그나마 차차 발길이 끊어져서 아버지가 전화로 호통을 쳤더니 며느리가 못 가게 한다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시부모와 언어 소통이 힘들어 죽어도 가기 싫은데 아들(남편)만 시댁에 가면 자기 입장이 난처해지니 아예 가지 말라고 한다는 말을 듣고 자식들이 국제결혼을 하게되면 자식들을 완전히 빼앗긴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는 것이다.
이 분은 “그런데 자식들이 한국사람 짝을 만날 기회가 없어서 막내가 또 국제결혼을 하게 되었다. 엘에이나 뉴욕 같이 큰 도시에 정착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후회스럽다. 혹시 한인회라도 아이들이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어 주면 좋을 것을…”하며 자신의 처지를 비관했다.
이제 주변의 많은 소년들이 그동안 자라서 짝을 찾을 나이들이 된 것이다. 그 때만 해도 필자는 아직 자식들이 어려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 후 틈나는 대로 주변의 몇 분에게 한인 청소년들의 만남의 장소에 관해 의사를 타진했으나 그 뜻은 좋은데 비용 염출 문제 등이 쉽지 않다는 반응이었고 한인회 역시 한인회관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 한두 번으로 그칠 일이 아니라는 데서 난색을 표했다.
어렵게 길러놓은 자식인데 타민족 며느리나 사위에게 자식을 완전히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 온다면 민족차별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국제결혼은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필자는 청소년들이 흥미를 가지고 날마다 어울릴 수 있는 방법은 엘에이나 뉴욕처럼 우리의 전통 풍물놀이패를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청소년들에게 의사를 타진했더니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이 고장 한인 청소년들이 짝만 찾는 게 아니라 이왕이면 모국의 전통 문화도 전승한다는 생각이 호감을 준 듯했다. 필자는 누구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큰 돈도 아닌데 보람있는 일 한 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사비 5천달러(현재 가치로 1만불 ~ 1만5천불?)을 투입해서 서울 종로에 있는 풍물패용 악기(꽹가리, 징, 장구, 북, 소고, 고깔, 옷 등) 전문점에서 20명 분 악기와 옷 등 일체를 구입해 왔다.
풍물패 이름은 우리의 단군 할아버지를 상징한다는 ‘장승’을 따서 ‘장승패’로 정하고 남녀 성별로 10명 씩 20명의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모집한 후 풍물을 지도할 선생이 없어서 또다시 사비로 서울에서 두 차례에 걸쳐 선생을 모셔와 학생들을 지도했으니 그 비용 또한 악기를 구입한 것 이상이 들게 되었다.
그 결과 장승패는 마이애미지역 한인사회는 물론, 플로리다의 다른 도시와 마이애미보다 한인 인구가 10배가 더 많던 애틀랜타(당시 이곳에 풍물패가 없었음) 까지 초빙돼 현지 한인회 행사를 빛내주는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필자의 아들이 같은 고등학교 여학생과 사귀고 있음을 눈치 채고 국제결혼에서 오는 폐해를 틈나는 대로 알려 주는데 전력을 다했다. “너는 김치찌개에 푹 빠지는 녀석인데 김치찌개는 서양 요리처럼 조리법(Recipe)만 안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한국 여성의 손맛이 가미되어야만 가능한 것인데 국제결혼하면 누가 그걸 만들어 주겠냐? 지금 사귀는 아이와는 연애만 하고 결혼은 한국 여자와 하는 게 네 평생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서 한동안이 지난 후, 또 다시 “국제결혼하면 아이가 엄마 쪽을 더 많이 닮는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양 쪽 닮은 손자나 손녀를 더 많이 안아 줄까? 아니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많이 닮은 아이를 더 많이 안아 줄까? 잘 생각해 보아라” 등을 계속 들려주었다.
이런 말을 할 적이면 아들이 고민을 하는 듯 표정이 한동안 어두워지곤 했다. 그러다 사귀고 있는 여학생이 아들과는 정반대 쪽 먼 도시의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만날 기회가 없어지자 차츰 거리가 뜨게 되었고 얼마 후 아들이장승패 소속 여학생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으니 부모로서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던가!
그 후 이 장승패 회원 중에서 세 쌍의 동포 부부가 탄생했고 그 중에 필자의 자식도 한 쌍을 이루었으니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장승패’에의 투자(?)는 성공작이었던 것이다.
지금 와서 후회되는 일은 당시 소년 소녀들을 위한 풍물패만 만들 게 아니라 이 고장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청장년 층 동포들도 함께 끼웠더라면 지금까지도 ‘장승패’가 건재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중고등학교 때 훌륭한 ‘장승패’ 회원으로 자라서 상당수가 다른 도시의 대학에 진학해 떠나갔고 또 이곳에서 대학을 갔더라도 역시 다른 곳에 직장을 갖게 되어 대부분의 장승패 출신들이 흩어지고 말았으니 ‘장승패’라는 이름은 이제 이 고장 동포사회의 역사에만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말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말, 글, 성씨, 얼까지 빼앗았던 일본 총독부가 한국의 풍물놀이패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조직으로 알아 이를 폄하하고 우리 민족의식 말살을 목적으로 풍물놀이패를 ‘농악대’라 부르도록 가르쳤는데 아직도 이러한 내용을 모르는 일부 사람들은 풍물패를 ‘농악대’로 잘 못 쓰고 있으니 이를 아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비웃겠는가 하는 것이다. 한민족의 일원이라면 다시는 ‘농악대’라는 단어는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덧붙여서, ‘사물놀이’란 여러 사람이 모인 풍물놀이패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 네 사람이 사물(꽹가리,징,장구,북 등 네가지 악기)을 다루는 놀이를 말하는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풍물놀이와 사물놀이의 차이를 모르고 구분 없이 쓰고 있다는 점이 안타까운 것이다.
(계속) kajhck@naver.com <876/201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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