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칼럼> “세상을 바꾼 20세기에 가장 탁월한 언론인” 이경원 대기자

▲워싱턴디씨 교외에 있는 '언론인기념관'의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한 자기의'부스'(Booth,위 왼쪽 끝)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경원 대기자.

▲워싱턴디씨 교외에 있는 ‘언론인기념관’의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한 자기의’부스'(Booth,위 왼쪽 끝) 앞에서 포즈를 취한 이경원 대기자.


<김현철칼럼> “세상을 바꾼 20세기에 가장 탁월한 언론인” 이경원 대기자

동양인(Asian)으로는 최초의 미국 주류언론의 저명한 사건기자(Investigative Reporter), 한국인 이경원(83, 미국명 ; K W Lee = Kyung Won Lee를 앞 글자만 따서) 대기자는 미국 언론인들이 20세기 중 가장 탁월한 기자 중 한 분으로 존경하고 있는 분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워싱턴디씨(Washington,DC)’ 교외에 있는 ‘알링턴 언론 기념관'(Newseum’s Journalism History Gallery in Arlington, VA.) 에는 전 미국의 5만여 명의 기자들 중 지난 20세기에 가장 훌륭했던 기자 5백 명의 부스(Booth) 속에 이경원 대기자도 포함시켰는데 거기에는 “세상을 바꾼 20세기에 가장 탁월한 언론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한국인으로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이경원(미국의 3대 공립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일리노이 대 언론학 석사) 선배는 사적으로는 필자의 외가 쪽으로 아저씨(모친의 고종사촌동생, 필자의 외당숙)가 된다.
이 선배가 보성전문(고대 전신) 영문과 재학 때 당시 중앙청 국장으로 재직 중이던 선친의 신원보증을 받아 미국 유학길에 오른 탓으로 평소에도 미국 대륙의 동남부 끝 ‘플로리다’와 서부 끝 ‘캘리포니아’라는 6시간대 비행 거리를 넘어 필자와는 자주 전화 통화를 하고 있다.

이 선배가 미국인들에게 존경받는 이유는 이 분이 미국 역사상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부정폭로기자요, 미국 사건기자의 세계를 새롭게 개척한 분이기 때문이다.
1977년, 이 선배는 명확한 증거도 없이, 동양계 부랑아인데다 살인사건 현장 가까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돼 마땅한 변론인도 없이 사형 선고를 받고 며칠 후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갈 17세의 한인 소년 이철수의 억울함을, 지금은 없어진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문 중의 하나인 ‘쎄크라맨토 유니온’지(Sacramento Union, 1851~1996)에 시리즈 기사로 연재함으로써 처형 직전에 석방하도록 만든 엄청난 대기자다.
당시 전 미국의 TV와 신문은 이경원 대기자의 이 쾌거를 일제히 보도함으로써 미국인들의 머리에 ‘한국 출신 K. W. Lee(이경원) 기자’를 각인시켰다.
또 캘리포니아 주 의원들과 판사를 포함한 공무원들이 자신들의 ‘은퇴연금법’을 주물럭거려 납세자들도 모르게 은근슬쩍 은퇴연금을 올려놓은 사건을 “황금빛 지붕(The Golden Dome = 캘리포니아 주 정부 청사의 별명, 청사의 지붕 색깔이 금빛)”이라는 제목으로 몇 달에 걸쳐 연재해서 이 기사는 수많은 라디오 토크 쇼(Radio Talk Show)의 주제가 되었고 부패한 공무원과 권력자들을 사칭하는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헤아릴 수 없는 훌륭한 비판기사 및 폭로기사로, 일반 기자로서는 평생 한 개의 상을 받기도 어려운 실정인데도 학계, 언론계, 법조계 등 각계각층으로부터 무려 31개의 상을 받은 미국 기자 세계에서는 너무도 유명한 존재인 것이다.
당시 주지사로 막 당선 됐던 ‘로널드 레이건'(후에 대통령이 된 Ronald Reagan)은 ‘은퇴연금법’ 관련 기사가 수차례 보도된 후 시민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특별회의를 소집했고, 주 의회는 결국 전임 팻 브라운 주지사(Governor Pat Brown) 시절 자기네가 몰래 통과시켰던 이 법안을 다시 폐기해 원점으로 돌려놓을 수밖에 없는 수모를 당했었다.
그렇게 안 하고서는 이미 기사로 전 시민들이 자기네 부당 행위를 다 알아버려 차기 선거에 당선될 가능성은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시민들은 아직도 그 기사로 인한 개혁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니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 기사로 이 경원 대기자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s)’ 후보에 올랐을 뿐 아니라 ‘퓰리처상’에 버금가는 미 프레스 클럽(Press Club=기자협회) 주관 “네셔널 헤들라이너즈 = The National Headliners Awards)상을 받아 전 미국의 기자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미국 시민들은 아무리 유명한 신문기자가 길을 지나가도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알아도 인사를 안 하고 그냥 무심히 지나치는 게 관례인데 이 선배의 경우는 지나가는 미국인들이 하나 같이 이 기자를 보고 “이경원씨, 안녕하세요? (Hi, K W Lee!, 미국서는 ‘미스터’를 안 부치고 통상 이렇게 불러 준다)”하고 인사를 하니 미국인들의 존경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만하다.
이 선배는 25년이나 근무해 온 소속 신문사(Sacramento Union) 편집국의 ‘기자 양성소장’이기도 했다.
당시 소속 ‘보브카니’ 편집국장이 훗날 이 선배의 은퇴 기념 파티석상에서 공개한 강연 내용을 들어 보면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신참 기자들을 자신의 사건기자 팀에 합류시켜 기사취재 방법과 독자와 뉴스 취재원에 대한 기자의 도덕적인 자세, 그리고 사건기사는 어떻게 쓰는지 등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한번 그와 함께 일해 본 기자들은 이경원 대기자의 일에 대한 헌신과 집중력, 그리고 엄격한 ‘취재 윤리’에 머리를 흔들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KW Lee는 사기꾼, 살인자, 악한 등을 가혹하게 다루기 때문에 그의 적이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었다. 막강한 관료들도 그에 저항하는 것은 그의 화만 돋우는 일임을 이제 다 알고 있다”고 이 분의 철저한 기자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이 분이 미국으로 떠나기 직전, 필자의 형제들 앞에서 선친의 시를 달달 외우다가 ‘미국 유학에서 돌아오면 즉시 영랑시 전편을 번역하겠다’고 다짐했으나 미국 유학시절, 일제에 결사 항거한 부친(독립유공자, 이형순)의 아들답게 미국 신문에 이승만 독재를 비판하는 날카로운 칼럼을 연재하면서 그의 귀국은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1973년 ‘CNS'(Copley News Service) 특파원으로 잠시 한국에 왔었고 회갑이 지나서야 정부 초청으로 귀국, 한동안은 서울의 영자신문 ‘코리아헤랄드(Korea Herald)’의 편집고문으로 활약하면서 ‘기자가 갖춰야 할 윤리 도덕과 취재 방법 등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교육’을 실시해서 후배들의 존경을 모았지만 이미 그의 한국어 실력은 안타깝게도 한국인의 마음을 노래한 깊은 서정 세계의 ‘영랑시’를 번역하기엔 녹이 슨 후였다.
필자가 21년 전 다른 신문의 편집위원직을 그만 두고 독자적인 신문(The Korean American Journal=한겨레저널)을 발행하자 이 선배는 신문 한 부씩을 보내달라고 했고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필자에게 전화를 걸어 “내가 40 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고 있지만 대학에서 배운 그대로 만든 이토록 솔직하고 정직한 신문은 처음 봤다. 불의와 부정을 저지른 악과의 타협으로 비판 대상자의 이름을 가명으로 감춰주고 있는 신문이 대부분인 요즈음에 100% 실명을 쓰는 철저한 기자의 고발정신 등이 마음에 든다”고 격려하기도 했다.

83세의 노령에도 하버드 대 케네디 스쿨(Kennedy School of Government, Harvard University) 등 미국 전역의 명문대를 돌아다니며 초청 교수로 강의를 하고 있는 열정과 사회정의를 위한 그칠 줄 모르는 비판성 칼럼 기고에 수많은 후배 기자들과 함께 필자 또한 힘찬 박수를 보낸다.
(kakajhck@naver.com) 818/2012-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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