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기자의 큐바통신 <19>

김현철 기자의 큐바통신 <19>

정치가가 아닌 이상주의 혁명가 ‘체 게바라’
미 정보국 사주로 사살 당해

▲시가를 즐겼던 미남 혁명가
▲시가를 즐겼던 미남 혁명가
‘체 게바라’

아르헨티나 출신의 미남 의사요 작가로 인기가 대단했던 혁명가인 ‘체 게바라'(Che Guevara, 본명은 Ernesto Guevara)는 ‘민중의 가치와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여기면서 자기 나라 아르헨티나를 떠나 어느 특정 국가 할 것 없이 ‘세계의 빈민 해방’을 외치며 오토바이크(Auto Bike)를 몰고 중남미 여러 나라는 물론 아프리카 콩고에서도 게릴라전을 벌였다.

1959년 1월 1일, 큐바 혁명이 성공하자 큐바 중앙은행 총재, 공업부장관 등 요직에서 신생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도와 준 후, 자신은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가가 아니라 피압박 민중의 해방을 위한 이상주의자요, 혁명가라는 사실을 자각한 ‘체 게바라’였다.

단 몇 년간이나마 큐바의 제2인자로서 현실에 맞지 않은 이상주의를 부르짖었던 것이 오히려 정치를 하고 있는 ‘까스뜨로’에게 피해를 주었음을 자각하고 1965년 아무런 예고도 없이 훌쩍 볼리비아로 떠나 게릴라전을 벌이다가 1967년 10월 8일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체포돼 상처를 치료 중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사주로 다음 날 낮 12시,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살당하고 만다.

그만큼 미국정부는 혁명 영웅 ‘체 게바라’의 존재가 두려웠던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미국의 바로 코앞에 있는 큐바가 공산화 된 것도 골칫거리인데 남미 다른 나라마저 공산화되도록 놓아 둘 수는 없었으리라.

그가 간지 40 여년이 흐른 지금도 그의 추모 열기는 전 세계 젊은이들과 지식층들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까스뜨로의 장기 집권에 싫증을 느낀 대부분 큐바 국민들도 체 게바라 만은 아직도 존경하고 있음은 그의 인기가 어느 정도 인지를 짐작케 한다.

이 세상에서 못할 짓이 없는 무소불위의(無所不爲)의 미국 정부가 비록 그의 몸은 죽일 수 있었지만 그의 전이된 넋이 온 인류의 가슴에서 오늘도 활활 타오르고 있음을 막을 길은 없었다. ‘빈민 해방의 영웅 체 게바라’는 몸은 죽고도 이 세상에 현재도 살아 숨 쉬고 있는 ‘혁명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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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까스뜨로'(우)와 현 국가평의회 의장 ‘라울 까스뜨로’ 형제

‘체 게바라’에 비하면 ‘피델 까스뜨로'(Fidel Castro, 84, 집안에 철도까지 갖춘 부자 집 장남, 변호사 출신)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게릴라 투쟁 중 체포된 그는 국민들의 ‘석방 데모’가 거세지자 ‘바띠스따’ 정권에 의해 체포된 정치범 전원이 멕시코로 추방될 때 같이 멕시코로 쫓겨난다.

1956년 11월 26일, 체 게바라, 라울 가스뜨로, 후앙 알메이다 등 82명의 무장 동지들을 규합, 배 ‘그란마'(Granma)호로 멕시코 뚜스빤(Tuxpan)을 떠나 1주일 후인 12월 2일, 큐바 동남부에 있는 오리엔떼 주(현재의 싼띠아고 데 꾸바 주)의 ‘뿐따 콜로라다스'(Punta Coloradas) 해변에 상륙해서 바띠스따 (Batista) 정부군 1만 2천명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이던 중 대부분의 전우들은 전사했고 겨우 살아남은 동지는 12명 그리고 소총은 7정뿐이었다.

그러나 농민 등 대부분의 빈민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성원으로 병력은 급속도로 증강 되면서 게릴라 전 2년여 만에 미주에서는 처음으로 큐바 혁명은 드디어 성공하기에 이른다.(계속) kajhck@naver.com <789/2011-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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