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철 기자의 큐바통신 <14>

김현철 기자의 큐바통신 <14>

처음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까스뜨로
미국의 끈질긴 억압에 소련을 택하고

▲ 혁명동지를 이끌고 산에 오르고 있는 피델 까스뜨로(1958)

▲ 혁명동지를 이끌고 산에 오르고 있는 피델 까스뜨로(1958)

당시 큐바 국민의 까스뜨로 지지는 대단했다.
국민들은 “까스뜨로”를 연호하며 그를 지지했고 그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이에 힘입어 1963년 2차 농지개혁을 단행한 그는 65년 10월 “큐바공산당”을 창당한다.

혁명 직후부터 몇 년간 까스뜨로는 당시 설탕의 총 수출 액이 전체 수출액의 80%(국민총생산의 25%)을 차지했는데 그 중 60% 이상이 미국자본에 의존하고 있었고, 수출량의 4분의 3 이 미국으로 수출되며 또한 토지소유자의 8%가 총 토지면적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점 등을 개혁 제 1 목표로 정하고 ‘미국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과 민중들에게 부를 균등 분배하며 소련 등 동유럽과는 다른 모든 나라와의 평화공존, 내정불간섭 등 ‘민주영세중립국’을 꿈꾸었다고 한다.

▲ 큐바 혁명 후 미국으로 탈출한 큐바인들을 앞세워 미국은 큐바의 피그 만을 침공했으나 실패 하자 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긴급히 사후 대책을 협의하는 케네디 대통령의 뒷모습.(1961,4,22),

▲ 큐바 혁명 후 미국으로 탈출한 큐바인들을 앞세워 미국은 큐바의 피그 만을 침공했으나 실패 하자 전임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긴급히 사후 대책을 협의하는 케네디 대통령의 뒷모습.(1961,4,22)

그러나 계속되는 극심한 미국의 경제봉쇄 정책으로 다급해진 까스뜨로는 자연스레 옛 소련에 도움을 청하게 되었고 적극적인 성격의 까스뜨로는 기왕 소련과 밀착하느니 아예 솔선해서 소련의 이익을 대변하며 큐바의 국제적 지위향상을 꾀하고자 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헤밍웨이 전기 작가들이 쓴 글에도 나타나는데 헤밍웨이가 혁명 후 까스뜨로와 친분을 유지하며 혁명에 성공한 것을 “기쁘다”고 표현하는 등 호의적인 발언을 했을 때는 아직 까스뜨로가 공산주의자로 전향하기 전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까스뜨로가 처음부터 공산주의자였더라면 헤밍웨이가 그와 친분을 가지지 않았으리라는 주장인 것이다.

미국이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의 까스뜨로를 극도로 적대시하지 않고 포용정책을 썼더라면 큐바 국민들을 위한 정부를 세우되 공산주의 국가로 가지 않았을 가능성이 보이는 대목이다.
까스뜨로는 이어 아프리카 중남미지역 게릴라 군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정부반란군을 훈련시키는 등 반제국주의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게 되니, 민주세계는 공산화 된 큐바를 규탄하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국 그리고 미국과 아주 가까운 나라 외에 큐바와 국교를 단절했던 대부분의 나라들(164개국)이 관계를 다시 맺었다.
중미와 남미의 여러 나라들을 포함해서 심지어는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본, 중국까지도 교류를 재개했다. (계속) 784/201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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